중국 고대의 사마천은 동양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오늘은 역사가 사마천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살펴보고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가 사마천, 역사 연구자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역사가 사마천은 애초에 집안이 역사 연구자 출신이었습니다. 몇 세대에 걸쳐 그의 조상은 역사와 천문학을 연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안 내력 덕분에 사마천은 일찍부터 역사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의 사마천을 데리고 다양한 문화적 장소, 유적지, 사당, 궁궐 등을 방문했으며 전국을 답사했습니다.
아버지와 쌓은 이러한 경험 덕분에 역사가 사마천은 불후의 명저 '사기'를 집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기를 통해 과거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세상의 만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탐구하였으며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꿰뚫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는 지금까지도 철학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굴곡과 수난
그러나 역사가 사마천의 인생이 언제나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릉'이라는 인물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당시 사마천의 나라였던 한나라 입장에서는 이릉이 반역자이자 배신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마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한나라의 왕이었던 한무제는 그에게 엄청난 벌금을 내든지, 사형을 당하든지, 생식기를 잘라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돈도 없고 죽기는 싫었던 사마천은 울며 겨자먹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 이후로도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왔습니다.
불후의 역작을 완성하다
사기의 편찬 과정에서 이러한 모진 사건을 당한 역사가 사마천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명예가 실추되고 건강 역시 무척 나빠졌지만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50대 중반에 이르러 사기의 편찬을 마무리지었고 위대한 역사가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
한무제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았던 사마천은 아무래도 나라에 대한 원망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과거에 사례를 사기에 편찬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대상으로 복수한 자들의 평가가 무척 좋은 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나라 출신으로 정치적인 공격을 받고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한 뒤에 초나라에 복수한 것을 두고 '장렬한 행동'이라는 평가를 남겼습니다.
이렇듯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서 원수를 잊지 않고 적에게 되갚아 준 이들에게 후한 평가를 내렸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중국에는 복수를 정당화하는 사고가 남아 있습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는 말이 이러한 문화적 유산의 예시입니다.
사마천의 무덤
역사가 사마천은 일생에 걸쳐 무려 52만 자 이상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집필 활동 덕분에 훗날 사마천이 죽고 난 뒤에도 많은 학자와 왕들이 그를 기리고 추모하였습니다. 특히, 사마천이 죽고 난 뒤 400년이 지나고 당시 한양 태수였던 '은제'가 그의 무덤을 재정비해주며 거대한 측백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나무는 무려 1,700년 동안이나 사마천의 무덤을 지켰으며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결론
역사가 사마천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위대한 문화유산 '사기'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신과 학문적 태도를 본받고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